Prologue, Fighter

 던전앤파이터의 캐릭터는 각자의 이야기를 담은 프롤로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격투가 역시 프롤로그가 들어가게 되어 제가 직접 작업했습니다. 보통의 일러스트 한두 장과 달리 만화는 페이지와 컷의 수가 많고 배경도 그려야 해서 작업량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에 비해 일정은 촉박하여 주말까지 밤새 그려야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나눠서 작업하면 시간을 아낄 수 있지만 제가 원하는 대로 모든 부분을 그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번 프롤로그도 다른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김태집님이 이야기와 설정을 맡아주셨습니다. 스토리보드는 웹툰으로 유명한 onesound님이 그려주셔서 작업에 굉장히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번 글은 그리는 방법에 대한 소개보다는 어떻게 프롤로그가 제작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춰 서술하겠습니다.

 가장 첫 번째 단계로 김태집님이 프롤로그의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써주셨습니다.
수쥬의 어느 도장, 방어 훈련에 게으른 격투가가 잠든 어느날 밤 적이 공격해온다. 도장의 모두가 나서 방어진법을 펼쳐 막으려 했으나 혈기를 참지 못 한 격투가는 적들 사이로 뛰쳐나간다. 격투가는 닥치는 대로 적을 때려 눕혀 전투를 마무리지었으나 뛰쳐나간 빈 자리 때문에 진법이 무너졌고, 많이 동료들이 다쳤다. 이로 인해 격투가는 동료들의 비난을 받게 되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도장을 떠난다.
 짧은 글이지만 만화로 그릴 경우 표현해야 할 내용이 많아 분량 조절이 관건이었습니다. 분량 문제는 태집님도 충분히 인지하고 계셨기 때문에 내용을 최대한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조절하며 다듬어주셨습니다. 세세한 전개가 잡힌 뒤 onesound님이 본격적으로 스토리보드를 그려주셨습니다.




 onesound님의 스토리보드는 완성되어야 하는 결과물의 방향과는 다르게 그림체가 굉장히 귀엽고 각 장면의 세세한 묘사도 전혀 없지만, 화면의 구성이나 연출이 모두 담겨있기 때문에 작업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스토리보드를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림만 많이 그렸을 뿐, 만화는 완전히 초보이기 때문에 부담감이 엄청났습니다. 한 달 반 안에 완성시켜야 했는데, 작업량이 엄청나고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매우 촉박했습니다. 게다가 작업 일정 중간에 전사 워크샵이 예정되어 있어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핑계로 다른 프롤로그에 비해 떨어지는 질을 보여줄 수는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폭풍야근과 주말근무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onesound님의 스토리보드를 구체화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각 컷마다 시점이나 묘사 방식, 구도 등을 고려하며 구체화시켰습니다. 다수의 인물을 하나의 시점 안에 정리해야 하는 것 자체가 보통의 일러스트에 비해 어렵고, 시점이나 자세도 일반적인 홍보용 일러스트에서 쓰이지 않는 특이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더욱 진행이 더뎠습니다.




 전체 페이지수는 16개로 확정되었고, 세부적인 구성에 있어서는 onesound님의 스토리보드를 바탕으로 여러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채색 만화의 제작이 전통적인 흑백 만화와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채색 그 자체이기에, 아름다운 색감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만화가 더욱 어려운 것은 일반적인 그림과 달리 전후 상황이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컷마다 보여져야 하는 상황이 있고 페이지 안에서의 앞뒤 연결이 자연스러워야 하기 때문에, 컷 하나의 구성을 위해 임의의 색을 사용하면 흐름이 깨질 수 있습니다. 각 컷에 필요한 색이 전체적인 흐름과 맞지 않다면 색감과 흐름 중 한 가지를 희생해야 합니다. 게다가 각 컷이 모여 이루는 한 페이지 안에서의 레이아웃과, 페이지 전체가 주는 인상, 각 페이지들 사이의 흐름도 신경 써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제가 의도하는 색감을 얻기 위해서는 스토리보드 단계에서부터 전체적인 색감과 화면 연출을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도했던 색감과 표현 방식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던파 일러스트와 같되 조금 더 강한 색으로 화면을 나누고 명암 단계를 줄여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만화는 대부분 흑백이라 참고할 것이 없어서 화면 구성이 인상적이었던 영화를 주로 참고했습니다. 특히 쿠엔틴 타란티노의 《Kill Bill》에서 유혈이 낭자하던 장면과 나카노 히로유키의 《Samurai Fiction》에서 보여준 강렬한 색감을 기준으로 작업했습니다. 다행히 중반 이후로는 여러 외국 그래픽 노블을 자료로 얻게 되어 많이 참고했습니다.




 앞서 잡은 대략의 구성을 이야기의 흐름에 맞춰 분류한 뒤 상황에 맞는 색감을 잡았습니다. 14 페이지는 격투가가 강한 충격을 받는 장면이기 때문에, 앞뒤의 흐름과 관계 없이 갑작스러운 색을 사용하여 읽는 사람도 비슷한 인상을 느끼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땅한 색이 떠오르지 않아 결정이 힘들었고, 15, 16 페이지의 색도 갈피를 잡지 못 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이야기의 흐름상 초반에는 낮, 이후로는 한밤 중이어서, 1-3 페이지는 난색, 4-8 페이지는 한색 계열로 쉽게 정했습니다. 9-11 페이지는 전투 장면이기 때문에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Kill Bill》과 《Samurai Fiction》의 색감을 참고해 강한 붉은 색을 위주로 작업했습니다. 작업이 중반을 넘어가서야 14 페이지 이후의 색도 모두 정했습니다.



 작업 일정이 촉박하여 세세한 작업과정이 남아있진 않기에 바로 채색이 완성된 상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채색 단계에서의 소요 시간이 엄청났습니다. 이전 단계에서 불확실했던 부분을 모두 다듬거나 추가하느라 단순히 그리는 시간 뿐 아니라 고민에 필요한 시간 역시 많았습니다. 수쥬가 배경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티벳 문화권에 기초했습니다. 스승의 복식도 당연히 티벳 승려의 복식을 참고했으나, 설정상 소림사의 느낌이 강해 문하생들의 복장과 일부 건물은 중국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장면의 해태상이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스토리보드 단계에서부터 어떻게 진행시켰는지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7 페이지의 전체를 조망하는 컷과 12 페이지의 소강 상태를 그린 컷은 위에서 바라본 시점이라 구도를 잡는 데에 꽤 애를 먹었습니다. 색감 때문에 가장 고민이 많았던 것은 2, 9, 14, 15 페이지로, 2, 9, 15 페이지는 전체적인 색감은 쉽게 잡은 뒤에 명암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색이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특히 14 페이지는 어떤 색감으로 작업할 지에 대해 감조차 오지 않아서 막바지까지 꽤 고생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나머지 페이지에서 전혀 쓰이지 않았던 초록색을 활용하여 마음에 드는 색을 그렸습니다.
 대부분 페이지 순서대로 작업했지만 잘 그려지지 않았던 9, 13 페이지는 꽤 늦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특히 13 페이지는 후반부까지 구도조차 잡지 못 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다른 페이지를 작업하는 동안 다른 분이 대략적인 구도를 잡아줬습니다.



 이렇게 그리는 과정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대사를 넣은 뒤 전체 작업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대사를 넣는 것 역시 익숙치 않아 오히려 넣기 전보다 안 좋아진 페이지도 꽤 있습니다. 11 페이지의 대사도 위치나 크기가 어색하고, 특히 14 페이지는 거울이 깨진 느낌에 맞춰 각각의 유리 파편에 맞게 글씨를 왜곡하여 넣을 생각이었으나 작업시간의 부족으로 의도를 충분히 살리지 못 했습니다. 반대로 10 페이지의 효과음은 의도대도 잘 들어가서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그 외에도, 마냥 평범한 것보다 패러디 요소를 넣어 더욱 재밌게 볼 수 있게 되길 바래서 여러 유명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스티븐 시걸, 척 노리스, 브루스 윌리스 등을 그렸으니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좋은 이야기를 정해진 분량 안에 압축해서 잘 보여드려야 하는데 아무래도 만화에 익숙치 못 하다 보니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은 만화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작업한 만큼 보시는 분들도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작업을 하며 요령이 생긴 만큼 다음 만화에서는 더 좋은 결과물을 보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