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프롤로그 제작과정을 소개하려 합니다. 마법사는 인간이 아닌 마계인이며, 심장이 어비스라는 것으로 대체되어 있습니다. 프롤로그에서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심장을 잃고 사망한 마법사가 미지의 인물에 의해 어비스를 얻고, 이를 통해 무한한 생명력과 힘을 얻어 아라드 대륙으로 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토리보드를 만드는 능력이 전혀 없는 저와 달리, 설정을 맡은 안남규씨는 작화가와 함께 오랜 기간 《아라드 방랑 파티》를 연재하셨던 분이라, 전체적인 이야기와 함께 스토리보드까지 만들어주셔서 작업이 훨씬 수월했습니다. 프롤로그의 이야기를 부탁드렸더니 연습장에 슥슥 그려서 금세 스토리보드를 만드는 것이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대부분의 연출이 완성본까지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연출에 대한 고민이 대폭 줄어들어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프롤로그와 달리 마법사는 꿈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무의식의 세계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비현실적인 공간인 만큼 기존 프롤로그에 비해 사실적인 묘사를 대폭 줄이고 신비한 분위기를 내고 싶었습니다.
프롤로그 속에서의 시공간은 크게, 무의식의 공간에서 깨어난 마법사가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 도입부, 갑자기 등장한 사신에 의해 자신의 자신을 회상하며 절망하는 중반부, 어비스를 얻게 되는 후반부, 아라드 대륙에서 깨어나는 종반부로 구성됩니다. 영화 《Matrix》에서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색감으로 구분하여 보여주었던 것처럼, 색감 혹은 그림체를 구분하려 그림만으로도 공간의 변화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특히, 프롤로그 작업의 특성상 그려야할 양이 굉장히 많은 것에 비해 주어진 시간은 매우 짧으므로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그림체를 고민했습니다.
안남규씨의 스토리보드는 이야기의 전달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세부적인 화면 연출을 위한 새로운 스토리보드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를 여주현씨가 맡게 되면서 몇 가지 장면이 변경되고 초반부의 노란색이 추가되었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단서를 얻어 초반부를 완성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색감에 대한 고민과 별개로 무의식의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비현실적이고 왜곡된 공간으로 보이게 할지도 문제였는데, 마법사는 설정상 특정인물에 의해 손으로 심장을 관통 당하여 사망한 것이라 손가락이 무의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여주현씨의 스토리보드 두 번째 장에 이것이 잘 드러나며, 덕분에 괴기스러우면서도 독특한 공간이 만들어졌습니다. 심장을 잃은 마법사는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채 무의식의 세계에 버려져 있으며, 정신적으로도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기에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안남규, 여주현씨의 스토리보드를 바탕으로 그린 초안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여주현씨의 연출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마법사는 아직 묘사 방식이 확정되지 않아 평범하게 그려졌습니다. 처음엔 머리카락처럼 고정적이지 않은 형태로 흩날리는 정도를 생각했는데, 이것이 구체화되어, 마치 수많은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것과 같은 묘사 방식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시공간의 흐름에 따른 색감의 변화 역시 까다로운 부분이었습니다.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는 장면의 구성에 따라 색감도 네 가지로 구분했는데, 비교적 정적인 동입부는 노란색과 무채색으로 단순한 색감을, 종반부의 아라드 대륙은 기존 던전앤파이터 일러스트의 색감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사신이 등장하는 중반부와 어비스를 얻는 후반부였습니다.
마법사가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부터는 미지의 인물이 사신의 형태로 등장하게 됩니다. 초반부가 비교적 정적인 데에 비해 중반부부터는 마법사가 심적으로 굉장히 흔들리는 부분이기에 갑작스레 색감이 바뀌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보다 강한 충격을 전하기 위해 보색을 활용하여 자극적인 색감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여러 색을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가장 자극적인 붉은색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붉은색을 기본으로 보색인 초록색을 추가하여 전체 색감을 잡았습니다.
사신의 형태 역시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손가락의 형태를 활용하여 묘사했고 사신이 등장하는 장면의 연출도 확정되었습니다. 이로써 가장 중요한 중반부의 연출이 확정되면서 전체적인 색감의 흐름이 완성되었습니다.
사신의 등장과 함께 마법사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데, 무의식 속의 마법사와 회상 속 인물을 헷갈리지 않도록 구분하여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 때문에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묘사 방법이 요구되었는데, 이것은 인형극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먼저 각 인물의 원화를 그린 뒤 이것을 다시 인형의 형태로 바꾸는 작업을 했습니다. 인물의 원화는 임정수씨가 맡아서 작업했습니다.
위와 같은 긴 과정을 통해 제작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결정한 뒤에야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시간의 여유가 없었기에 이후의 작업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어 사실상 단계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바로 완성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실험적인 그림체였기 때문에 그리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었지만 그만큼 아쉬운 점도 많은 작업입니다.